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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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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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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세를 배격하고 자주국방을 강조해온 양호조광조와 끝까지 의리지킨 혜강공 양팽손제주양씨(濟州梁氏)는 양을나(梁乙那)를 도시조(都始祖)로 받든다.제주양씨의 중흥시조 양순은 양탕의 후손으로, 서기 682년(신라 신무왕 2)에 신라에 입국,국학(國學: 신라의 예부(禮部)에 속한 최고교육기관으로,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문왕 2년(682)에 설치했다고 한다. 경덕왕때 명칭을 대학감(大學監)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국학으로 되돌렸음)에 입학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신라의 관직으로 당나라 때 황제의 자문 구실을 하며 주로 조칙의 기초를 담당하였는데, 이 제도를 신라에서 받아들였고, 고려때는 한림원에 속하여 문한지임(文翰之任)을 담당하였음)가 되었으며,신라에서 양순을 한라군(漢拏君)에 봉하여, 후손들이 제주를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양을나(良乙那)를 유일시조로 받드는 양(梁)씨는 관향이 70여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제주양씨.남원양씨.충주양씨 3본의 지파(支派)이며, 제주양씨에서 분적(分籍)되었다.양(梁)씨는 정통을 이어 온 제주(濟州)와 육지의 양(梁)씨인 육양(陸梁)으로 대별된다.모든 양씨(梁氏)는 탐라(耽羅)의 신인(神人) 양을나(良乙那)를 유일조로 하는 동계혈족이며, 본래는 양성(良姓)을 쓰다가, 신라때 양(梁)으로 개성(改姓)하여 현재에 이어지고 있다.그러나 고려말기에 이르기까지 양(良)과 양(梁) 두가지로 쓰여 왔으나, 고향에 남아 있는 제량(濟梁:제주도 양씨)은 오래도록 양(良)으로 사용한데 반해, 육지로 이주한 육양(陸梁)이 먼저 양(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인구조사에서 제주양씨는 1985년에는 총 26,702가구 113,442명이었으며,2000년에는 총 41,169가구 133,355명이었다.제주양씨종회(濟州梁氏宗會)의 기록과 문헌에 보면, 서기 374년(신라 내물왕 19)에 국주(國主)인 양탕(良宕)이 광순사(廣巡使)로 신라에 들어가,왕으로부터 중상(重賞)과 작록(爵祿)을 받고 처음으로 양성(良姓)을 양성(梁姓)으로 고쳐,양씨(梁氏) 중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한다.그 후 682년(신문왕2)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제수받은 양순(梁洵:한라군 파조)이 한라군(漢拏君)에 봉해졌으며, 본관을 제주로 하여 육지로 진출한 제주양씨(濟州梁氏)의 1세조로 받들어졌다.또한 757년(경덕왕16) 나라에 공을 세워, 남원부백(南原府伯)에 봉해진 양우량(梁友諒:남원양씨 파조)은 남원을 본관으로 하여, 후손들이 신라와 고려를 거치는 동안 저명(著名)한 대성(大姓)이 되는 대들보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또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역사기록은 양부(良夫),양질(良質) 등이 신라에 들어가 내외병마사(內外兵馬使:절도사.조선때는 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이벌찬(伊伐 :각간,서불한 舒弗邯:신라 17관등 중 1등급관위) 등 진골(眞骨:부모중 한쪽이 왕가 계통)이 아니면 오를 수 없는 높은 벼슬과 학자,장군,고승 등이 배출되었으며, 명상(名相:유명한 정승)과 경신(卿臣)이 시대를 주도하여 나라발전과 역사진전에 큰 몫을 담당했다고 전한다.특히 제주양씨에서 분적한 남원양씨(南原梁氏)의 중시조인 둔암(遯菴) 양능양(梁能讓)은 송나라에까지 알려진 예경(禮經)의 제1인자로, 학문이 출중하여 벼슬이 궁병부낭중(宮兵部郞中:정5품).동궁 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태자 시강원의 벼슬)였으며,고려 태조 왕건의 증손녀 좌복야(左僕射:상서도성의 정2품부총리) 왕림의 딸을 배위로 삼았다.성리학의 대가 삼강(三江) 양주운(梁朱雲)은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찬화공신(贊化功臣)에 책록되어,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해지고 농업과 누에치기를 장려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충주양씨(忠州梁氏)의 중시조 양능길(梁能吉)은 고려개국 때 왕건을 도와 삼한통일에 공을 세워 삼한통합대장군(三韓通合大將軍:종3품)에 오르고, 예성부원군(蘂城府院君)에 훈봉되었다.양을나(良乙那)시조의 위업을 이어온 제주의 제주양씨(濟州梁氏)는 938년(고려태조 21) 고려에 들어가 선린우호를 다진 양구미(梁具美:성주공파 중시조)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탐라국을 통치해왔으며, 특히 성주작(星主爵) 양호는 외세를 배격하고, 자주국방을 강조해온 역사적 인물이다.제주(濟州)는 우리나라 최대의 섬이다. 명칭은 도이(島夷).주호(州胡).탐모라(耽牟羅).섭라(涉羅).탁라.탐라(耽羅).제주 등 다르게 불려왔다. 신라의 속국이었던 탐라국(耽羅國)은 938년(태조 21) 고려의 속국이 되었고, 1105년(숙종 10)부터는 군을 설치하여 직접 다스리다가, 1211년(희종 7)에 탐라군을 제주로 개편하였다. 1271년(원종 12)에 삼별초(三別抄)가 제주도에 웅거하면서 몽골에 마지막까지 항쟁을 벌이다가, 1273년에 패한후 제주도는 원나라의 직할지가 되어 목마장(牧馬場)이 설치되었다.그 후 약 1세기 동안 제주도는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소속이 여러 차례 바뀌는 복잡한 과정을 겪다가, 1367년(공민왕 16)에 완전히 고려에 회복되었다. 조선 태종때 오랫동안 전래되어 온 성주.왕자(王子)의 칭호가 폐지되고, 실질적인 행정력속에 포함되었다.1946년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제주도(濟州道)로 승격하고, 북제주군 및 남제주군을 신설했다.1955년 제주읍을 시로 승격하였고 1980년에 애월면.구좌면.남원면.성산면을 읍으로 승격했으며 1981년에 서귀읍과 중문면을 합하여 서귀포시로 승격하였다. 1985년에 조천면을 읍으로1986년에 구좌읍 연평출장소를 우도면으로 승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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